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베푼 넉넉한 관용들은 나의 내면에 매우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었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中

어린 시절 저와 할머니는 정말 믿어지지 않도록 밀착되어 있었고 어른이 된 후에도 그분이 제게 주었던 것들, 이를테면 일관된 사랑, 산소 같은 지지와 격려, 부담감 없는 편안함 같은 것의 의미를 하나하나 꺼내서 자양분으로 삼고 있어요. 저와 할머니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어요. 나와 할머니는 분명 두 사람인데 무릎 아래쯤부터는 뭉게뭉게 구름 같이 합쳐지면서 사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가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제 곁에 단단히 계신다는 걸 알아요. 할머니는 나의 또 다른 자아인 거죠.

할머니는 소박하고 말씀이 없는 분이었어요. 언제나 덤덤하게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사랑과 평화를 주시던 분이셨죠. 울퉁불퉁한 사춘기를 넘길 때, 세상과 온통 불화해서 세상을 따돌리고 세상에서 나를 은폐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조차 ‘할머니만은 내 마음을 알아. 내가 왜 이러는지를 알아.’ 그런 느낌을 항상 받았어요. 스치듯 지나치는 눈빛만으로도, 아주 복잡하게 꼬이고 얽혀 있는 제 마음을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언제나 제 속내를 알아봐 주셨죠.

우리 집은 인왕산 허리 부근, 얼마나 단단한지 사람들이 ‘땡돌’이라고 부르는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진 산줄기에 손바닥만 한 집들이 고물고물 기어올라가 있는 조그만 달동네 한가운데에 있었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中

제가 태어나던 해에 우리 가족들이 서촌으로 이사를 왔어요. 제 첫 소설이었던 ‘나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네 옥인동 집이 제가 살던 곳이었죠. 저희 어머니는 수도도 안 나와서 거기 살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악몽 같은 곳이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에게는 그저 행복만 가득했던 곳이었어요. 내가 어릴 때 살던 곳과 어릴 때 봤던 그 아름다운 풍경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되죠. 중간에 10년 정도 다른 곳에서 살 때도 그 나름 편하고 만족했지만 언젠가부터 서촌으로 돌아가야겠어. 그곳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계속했어요. 참 신기한 게 운명처럼 정말 다시 돌아올 계기가 만들어 지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죠.

소설에 나오는 감나무도 할머니가 묘목을 사 오셔서 직접 심으신 거예요. 감나무는 아직도 잘 살아 있어요. 지금 그 집에 살고 계시는 분이 감사하게도 가을이 되면 할머니 감나무에서 자란 감을 보내주셔요. 그럼 ‘할머니가 아직도 나한테 이런 사랑을 주시는구나, 아직도 내게 먹을 걸 챙겨주시는구나.’ 싶어요. 저는 그 땡감을 아파트에서도 어떻게든 주렁주렁 매달아 곶감을 만들어 저도 먹고 친구들도 나눠주곤 해요.

할머니가 물려주신 대부분의 것들이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조용하고 작아서 나는 그것의 중요한 의미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내면에 중요한 안정감의 기반이 되었고 나는 숲의 습기를 흠뻑 머금고 자라는 초록 이끼처럼 그 안에 살았으며 중요한 것들을 배운 줄도 모르고 배웠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中

이 마을의 정말 소소하고 별것 아닌 것들을 다 사랑합니다만, 특히나 볼 때마다 좋아하고 감동하는 건 이끼예요. 오래된 벽에 이끼가 파랗게 자라고 있는 걸 보면 그냥 그게 좋더라고요. 이끼가 자라고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촉촉함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촉촉함이 사라져 하다못해 이끼조차 보기가 힘들어진 세상인데 여전히 이 동네에는 이끼가 있네 싶어요. 보이지 않는 사랑과 촉촉함으로 감싸져 있었던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서 이끼를 보면 반갑고 좋죠.

저는 아주 유난스럽도록 이 동네와 어린 시절에 대해 집착이 깊고 거기서 어떤 근원적인 생각을 많이 길러내는 사람이 되었어요. 제 작품 목록의 절반 정도가 제 어린 시절과 이 동네에 대한 이야기일 만큼요.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20대에는 나는 작가가 되기에 너무나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작품 활동을 하려면 대대로 물려 받은 가족 공동체적 경험의 유산이나, 문학적 자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가난하다고 생각해서 한탄한 적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저는 서촌을 물려받은 사람이고 그것을 정말 알차도록 쏙쏙 뽑아서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서촌이라는 유산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이런 아름다운 유산이 있어서 참 감사한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죠.

나는 엄마가 내 몫으로 공들여 가꾼 기름진 푸른 목장을 마다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바늘구멍 같은 빈틈을 찾아내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 일은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라는 격언의 중요한 예화로 꼽힐 만한 것이다. 젊은이가 낯선 세계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것은 비극이나 위험이 전혀 아니며 이 세상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축복이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中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고 석사까지 마쳤는데, 알고 보니 저는 전형적으로 ‘이과인 줄 안 문과애’였어요.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생물학과에 갔는데 오히려 연구실에서 그 예쁜 것들을 실험해야 하는 입장이 된 거죠. 데이터와 통계, 그래프의 세상도 참 재미가 없었고요. 제가 언제나 매료되고 끝없이 재미있다고 느낀 건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감정을 표현하는 이야기였더라는 걸 깨닫고 박사 진학을 앞두고 글 쓰는 삶, 소설가의 세상으로 전환했어요.

그때 저는 이미 제가 되게 늙은 것 같고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 기분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겨우 25살이었거든요. 젊은 사람이라면 다양한 생각과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게 당연하고, 그 무엇도 헛된 일은 없어요. 내가 해본 것은 다 내 자산이 되죠. 젊은 친구들이 미래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겁을 많이 먹는데, 우리 세대가 너무 겁을 주면서 키웠나 보다 그런 미안함이 좀 있어요. 하다 보니 잘 되는 것도 있고 해보니 안 되는 것도 있어요. 저도 그랬고요. 인생은 병가지상사(실패하는 일은 흔히 있으므로 낙심할 것이 없다는 뜻)이고 해 봐야 아는 것이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the seochon 9호는 6월 5일 망종(芒種)에

님을 찾아갑니다.

소만의 인사는 김태운 님의 시와 함께 끝마칩니다.

그럼 돌아오는 절기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