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낮이 조금씩 짧아집니다. 늦은 밤까지 꽉 찼던 열기도 차츰 기세를 달리하고요. 짙은 밤이 되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반가우면서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올여름은 유난히 제 발자국을 깊게 찍고 지나가는 것 같아요. 갑자기 몰아치는 비만큼이나 빠르게 변하는 하늘을 보며 때가 지나면 다시 볼 수 없고 다시 느낄 수 없는 시절의 인연과 상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때를 놓치면 손 뻗기 어렵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알 것 같고요. 때에 맞는 만남이 있듯 그에 맞는 이별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덧없는 시간 끝에는 상실도 그리 서글픈 일이 아닐 거라는 사실도요.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것이 영악한 시간이 주는 가치일까요.
해가 진 자리에 달이 뜨고,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가을이 오고, 메마른 가지 끝에 새봄의 생명이 틔워지는 것처럼 구태여 마음을 갉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채워질 겁니다. 달빛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요. 얼마 남지 않은 여름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예순다섯번 째 서촌 이야기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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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LOG 여름의 끝자락에서 더듬어 본 서촌의 겨울
산책의 영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 시간을 걷다
서촌라이프 산책 서촌라이프에서 시작해 산책으로 만나는 서촌 가게와 전시 소식
산책 LOG
나의 서촌 산책을 기록합니다.
오늘의 산책자
오늘은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산책자
jhuiceful님의 산책로그를 보내 드립니다. 지금은 진주시에 살고 있지만 서울에 살던 당시 서촌의 매력에 빠져 지금도 시간이 나면 자하문로로 달려간다고 전해주셨는데요.
마음만은 영원히 명예 서촌 주민인 jhuiceful님의 산책 이야기에는 서촌의 지난겨울 모습이 담겨 있답니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겨울의 서촌 이야기를 함께 걸어가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소중한 이야기를 전해주신 jhuiceful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산책한 날
2023년 2월 10일 금요일
그날의 날씨
오전까지만 해도 온통 흐렸지만, 점심을 간단히 먹고 산책하다 보니 점점 볕이 들어오던 따뜻한 날씨
산책 코스
사베 종각 - 광화문 - 서촌 하우스오브블루
산책 시간
16시 - 19시
산책하며 자주 듣는 노래 | 페퍼톤스 - 공원여행
산책 기록 | 산책에서 마주한 것
남부터미널에 도착해서 곧바로 버스를 타고 사베 종각으로 향했어요. 간단히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광화문을 지나쳐 오쁘띠베르에 가서 레몬 타르트 한 조각을 시켜 2층 창가 자리에 앉았어요. 오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우중충했던 터라 살짝 멜랑꼴리한 기분으로 타르트를 느릿하게 먹고 있었는데 창가로 서서히 볕이 들어오더군요. 평소에도 햇볕을 정말 좋아해서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리로 나갔죠. 바로 근처에 있던 올라이트로 가서 다이어리를 한 권 사고, 친한 언니를 만나 홈보이서울에서 오렌지 치킨을 먹었어요. 저녁을 먹고 나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하우스오브블루로 다시 걸어가 재즈 공연을 감상했던 기억이 떠올라요.
올라이트에서 다이어리를 사고 나와서 골목 앞에 서 있는데, 사선으로 내리쬐던 햇볕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라파엘의 집 간판 노란빛과 바로 옆 돌담길, 산책하던 강아지의 갈색 털이 볕과 함께 어우러져 거리 전체가 따뜻하게 물든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날 오후가 올해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여유로웠던 오후라고 생각되네요.
올라이트 앞 골목의 따뜻한 풍경과 하우스오브블루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즐겼던 재즈음악, 오쁘띠베르 레몬타르트의 밝은 노란빛을 모두 종합하면 제가 매번 없는 시간을 쪼개서 서촌에 가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봄에 가도, 겨울에 가도, 여름에 가도, 가을에 가도 서촌에서는 늘 다른 빛깔과 온도의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날 산책에서도 서늘한 공기와 밝은 햇살 속에서 다시 느낄 수 없는 그날만의 따뜻한 감정을 마주했고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서촌 골목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따뜻한 감정만이 가득 들어차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막연히 동경하고 상상했던 그때 그곳으로 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과거에 마음의 무게를 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길과 아드리아나가 그런 사람이죠. 때로는 글과 그림으로, 때로는 음악이라는 작은 촛불을 들고 더듬더듬 밝힐 수밖에 없는 과거는 만져보지 못해 안타깝고 말할 수 없어 막연하고 느낄 수 없어 슬픈 존재일 겁니다. 더군다나 예술가인 그들에게는 특히 그럴 테고요. 기막힌 우연으로 과거로 돌아간 두 사람은 파리의 밤을 걸으며 동화 같은 시간을 보내다 한 사람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에 머무는 선택을 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결국 부정할 수 없는 현재, 현실이 되겠죠.
그러고 보면 과거는 낭만으로 기억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니 힘들고 막막했던 순간도 미화되고 더러는 망각하여 찢기고, 심지어 제멋대로 오려 붙여져 그 틈 사이로 낭만과 이상이 채워지죠. 지나온 시간을 위로하고 다가올 시간을 희망하기 위한 뇌의 노련한 노하우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모든 선택과 시간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다독이고 싶은 마음의 고독한 외침일까요. 어떤 이유든 과거를 떠올리는 건 다시 갈 수 없거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공간에 대한 짙은 향수를 자아내는 묘한 감각인 것 같습니다.
길과 아드리아나는 1920년대 파리의 밤거리를 거닐며 시간과 사랑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눕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시공간에 할지라도 찰나 같은 기억으로 긴 시간을 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이 아주 먼 미래의 우리가 돌아볼 때는 다시 가지 못해 그리운 그곳이 되지 않을까 싶었고요. 오늘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애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긴 길을 걷다 이야기와 음악으로 밤을 늘리고 동경하는 존재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가면 좋을 서촌의 공간을 소개해 드릴게요. 길과 아드리아나가 맞닥뜨렸던 마법은 없겠지만 그들이 보낸 파리의 시간 못지않은 서촌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여름밤은 동화 같아요. 해가 지고 일과를 마무리할 시간이지만 마음만은 아직 하루를 끝내고 싶지 않은 은근한 설렘이 가득하거든요. 하늘의 빛이 내려앉은 자리에 도시의 불빛이 채워지고 여전히 북적거리는 거리와 광장의 분수에서 피서하는 도시의 아이들, 그옆에 맥주로 묵은 마음을 달래는 사람들과 끊어지지 않는 대화가 밤을 늘리죠. 이런 여름밤이 짧아지는 게 아쉽지만 변화 뒤엔 항상 새로움 영감과 놀라운 만남이 있으니까요. 9월, 가을의 서촌은 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기대되는 오늘입니다. 그럼 우리 9월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