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미풍이 속삭이는 3월, 경칩(驚蟄)이 찾아왔습니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경칩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듯 합니다. the seochon 3호에서는 여행객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을 만나봅니다. 바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삶의 방향을 찾고, 그 길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서촌에서 ‘카페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정다현 대표입니다.

알베르게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순례자 전용 숙소인데요. 다현 님은 ‘카페 알베르게’에서 순례길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만의 길을 찾도록 돕고 있습니다. 경칩을 맞이해 여행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길 바라며 다현 님의 여행 이야기를 전합니다.

✍️Editor’s view 

부엔 까미노(Buen Camino)는 ‘좋은 여행, 좋은 길 되세요’, ‘당신의 앞날을 축복합니다’라는 의미를 담은 스페인어로, 순례자에게 안녕을 바라며 건네는 인사말이에요. 다현 님은 순례길을 걷고 싶어했던 남편 승연 님에게, 순례길에서 만났던 친구에게, 순례길을 떠나려 카페 알베르게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이 인사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스스로에게도 인사하죠. 부엔 까미노!

“저는 누군가의 가치를 발견하고 알아차리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빛나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 숨겨진 빛을 함께 발견하고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아요.”

동행에서 독립으로

10년 전 신혼 때 남편과 저는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을만큼 바쁜 회사 생활에 지쳐있었어요. 어느날 남편과 맥주를 마시면서 여행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남편의 반짝반짝한 눈빛을 발견했어요. 그 순간 그 사람의 꿈을 함께 이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1년 후 함께 순례길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저는 해외 여행 경험이 없었지만 남편은 이미 순례길을 한 번 다녀온 고수였어요. 그래서 그의 계획에 따라 여행하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죠. 그런데 여행 3개월 후, 남편은 계획에 대한 부담감으로 지쳐버렸고 “함께 여행을 하려고 왔는데 왜 너의 여행 없이 나의 여행만 따라오냐”고 묻더라고요. 그 순간 저는 제가 그의 꿈에 동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같이 길을 만들어 가는 여행자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후엔 여행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견을 내기 시작했죠. 서로의 역할을 이해하고 조율한 덕분에 여행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은 제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지금 만약 다시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혼자 가보고 싶어요. 여행길에서 혼자서 자립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일상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았거든요.

길잡이가 된 순례길
순례길에서 20대 초반의 한국인 여성 친구를 만났어요. 대학교 방학 중에 혼자 순례길에 왔던 그 친구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여행하는 저희 부부에게 큰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어요. 어떻게 큰 결심을 할 수 있었는지, 저희 삶에 대해 질문하면서 마치 삶의 정답을 찾는 듯 했어요. 그 친구에게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결국 그 친구와 끝까지 길을 걷게 됐고 순례길을 마친 후에도 연락을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최근에는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고 소식을 전해왔는데 만날 때마다 삶의 통찰력이 생기고 삶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그 친구는 순례길에서 저희와 나눈 대화가 자신의 삶에 큰 지침이 되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친구도 제 삶에 큰 의미를 줬고요. 제가 대단한 것을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만드는 가치있는 일을 해나가고 싶어요.

알베르게에서 찾은 나의 길
서촌에서 카페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처음으로 ‘진짜 내 꿈’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어요. 많은 일을 책임지고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서 이 공간이 나의 꿈이 아니라 남편의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물론 순례길은 저에게도 큰 의미였지만,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거나 나만의 소명으로 이끌어갈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아니었죠. 그 과정에서 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됐어요. ‘나의 진정한 강점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보람을 느끼는 사람일까?’ 저는 순례길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동기부여를 잘 해주는 사람이었어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건네고 또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답을 찾아갈 때마다 큰 보람을 느꼈거든요. 그들을 격려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이었어요. 이 능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우연히 접하게 된 ‘감정 코칭’이라는 분야에 큰 흥미를 느꼈어요. 1년간의 수료를 통해 전문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제는 순례길 동기부여 뿐만 아니라 감정 코칭 수업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에겐 큰 의미인 것 같아요.

✍️Editor’s view 

산티아고 순례길 곳곳에는 순례자들을 목적지로 안내하는 조개껍데기 표식이 있습니다. 어둡고 험난한 길이어도, 잠시 길을 잃어도 이 조개껍데기만 잘 보고 걷는다면 원하는 목적지로 잘 찾아갈 수 있죠. 내가 정한 목적지만 있다면, 조개껍데기만 보고 걷는다면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목적지가 선물하는 여유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면 길을 잃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내가 정한 목적지가 있으니 잠시 길을 잃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찾아갈 수 있죠. 목적지만 있다면 새로운 길을 가는 건 오히려 생각하지 못한 경험을 선물해주기도 해요. 이처럼 잠깐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명확하게 해야 해요. 특히 직업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소명을 깊이 생각해보는 거죠. 목표가 명확해지면 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방향이 잡혀요. 막막함에 의해 헤매는 치열함이 아닌, 명확한 목적 의식을 가진 치열함은 전혀 다른 경험이에요. 목적지가 명확하면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유지할 수 있어요. 발은 끊임없이 움직이더라도 마음은 평온하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여유를 즐길 수 있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거예요.

지금을 뛰어넘는 용기

여행의 수많은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여행을 결심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여행뿐 아니라 모든 일을 시작할 때 결심이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죠.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두려움이 생겨서 결국 안 할 이유들을 찾게 되지만 결단을 내린 뒤부터는 해야 될 이유들을 만드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확신이 드는 순간 일단 해보는 거예요. 처음에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권유했을 땐 저도 불안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한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라고요. 지금 여행을 떠나는 1년은 당장은 엄청 큰 것 같지만, 우리 인생 전체로 봤을 땐 정말 일부분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1년을 값지게 잘 만들면 남은 여생에서 굉장히 좋은 재료로 쓸 수 있다고 말했죠. 저는 이 말을 일상에 적용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눈앞의 것들을 놓지 못하면 그보다 장기적으로 더 의미있는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니까요.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 시간은 너무 작은 점에 불과한데 당장의 불안때문에 종종걸음을 걷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보잘것없는 내 모습도 받아들이는 여행
여행은 나의 ‘날것’을 보는 과정이에요.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죠. 회사에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가보니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찌질한 모습까지 드러나면서 내가 이런 모습도 가지고 있었구나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되죠. 하지만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꾸미고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여행에서는 그런 부담 없이 내가 평소 못 해봤던 것들, 찌질하게 살아보는 것을 경험할 수 있거든요. 그래도 괜찮구나, 이런 모습도 내 삶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죠. 멋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의 이런 모습도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일인용 1P: 나의 감정을 혼자 되돌아볼 수 있는, 무언가를 결심할 때 필요한 서촌의 조용한 공간

봄이 찾아오니 몸이 분주해진다. 겨우내 입은 도톰한 옷을 넣을 준비를 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계절이 변할 때도 손이 필요한데, 하물며 ‘새로운 결심’을 해야할 때는 얼마나 큰 마음을 써야 할까. 새로운 결심과 그 마음이 들어앉을 여유가 필요한 순간, 서촌의 이곳을 찾아간다.

일인용 1P.  나만의 시간, 책, 음악과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사전에 내가 마실 음료와 책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취향’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된다.

한두 명이서 앉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한 두시간은 밀도 있게 나의 마음을 바라보게 한다. 오롯이 나를 마주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필운대로 벚나무가 선명하게 보이는 통창, 그 앞에 나란히 놓여있는 두 개의 의자와 책상, 취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들과 주인의 사물로 둘러싸여있는 심플하고 따뜻한 공간. 이야기만 들어도 상상력이 자극되는 공간, 일인용 1P에서 새봄에 새로운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 일인용 1P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184-2
⏰ 수-일 12:00 - 20:00 / 월-화 휴무

📞 02-2211-2211

동면을 끝내고

                                                           김태운

쓰다가 계절이 바뀌어 버린

펜을 다시 쥔다

꽂혀 옴짝달싹할 수 없던 펜은

잉크를 끌어안고 동면에 빠졌다

오래 긋자

툭툭 동면을 마친 개구리처럼

종이 위로 잉크, 모습을 드러낸다

적시며 다시 제 땅을 넓혀 간다

몇 글자 안 썼는데

이미 종이는 와글와글 시끄럽다

쓰다가 다시 한 계절이 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꼭 붙잡고 이제는 가야 한다